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(문단 편집) === [[니죠 덴노]]의 친정 === [[9월 3일]], 타이라노 시게코는 고시라카와인의 제7황자인 노리히토 친왕(憲仁親王, 훗날의 [[다카쿠라 덴노]])을 출산했으나, 15일에 노리히토를 황태자로 세우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인세이파의 타이라노 도키타다(平時忠, 시게코의 오빠), 타이라노 노리모리(平敎盛, 키요모리의 동생), 타이라노 모토모리(平基盛, 키요모리의 둘째 아들), 후지와라노 나리치카(藤原成親), 후지와라노 노부타카(藤原信隆) 등이 니죠 덴노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했다. 그 뒤 고시라카와인은 정치에서 배제되었고, 국정은 [[니죠 덴노]]와 [[관백]]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합의로 운영되었다. [[12월 17일]]에는 칸닌류 출신(도쿠다이지 사네요시의 딸)으로 전임 [[관백]]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양녀인 후지와라노 무네코(藤原育子)가 입궁하여 이듬해인 오호(應保) 2년([[1162년]]) [[2월 19일]] 중궁으로 책봉되었고, 칸닌류의 후지와라노 사네나가(藤原實長)가 주구노곤노다이후(中宮權大夫, 중궁권대부)가 되었으며,[* 다이후 쿠조 카네자네는 이때 14세로 명목상 지위만 유지했다.], 키요모리도 다이리를 경호하게 되어 [[니죠 덴노]]를 지지할 뜻을 명백히 보이면서 인세이파는 궁지에 몰렸다. [[3월]]에는 앞서 유배당한 오야키고몬 쓰네무네의 교토 귀환도 허락되고, 뒤를 잇듯 6월 23일에 사네나가의 밀고로 [[니죠 덴노]]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쓴 미나모토노 스케카타(源資賢), 타이라노 도키타다가 유배형에 처해졌다. 도바 상황 때부터 [[인세이]]를 지지해오던 귀족들의 인식으로서는 [[니죠 덴노]]가 정통성을 가진 진짜 통치자였고, 고시라카와인은 어디까지나 '잠정적' 존재에 불과했다. 인세이를 정지당한 고시라카와인은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. 오호 2년([[1162년]]) 정월의 구마노 참배에서 《천수관음경》(千手観音経) 1,000권을 읽는데 고신타이(御神體) 거울에 빛이 나는 것을 보고 >"10,000의 부처의 원(願)보다도 1,000수(千手)의 맹세를 의지하니/시들어버린 초목마저도 자라나 꽃을 피우네"(万の佛の願よりも千手の誓いぞ頼もしき、枯れたる草木もたちまちに花咲き実なると説ひたまふ) 라는 내용의 이마요를 노래하는 등,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게 되었다(《료진히쇼 구전집》). 조칸(長寛) 2년([[1164년]]) [[12월 17일]]에 고시라카와인은 여러 해 동안 품어온 숙원대로 1,000개의 관음을 모신 관음당(觀音堂), [[렌게오인]](蓮華王院)을 지었다[* 렌게오인의 공사는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비젠 국의 지행으로서 맡아 실행했다]. 고시라카와인은 낙성 기념식을 겸한 공양 법회날 [[니죠 천황]]의 행행(行幸)과 지시(寺司, 사사)의 공에 대한 포상을 바랬지만 천황이 어느 것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자, >"아아, 어쩌면 저리도 미울까"(ヤヤ、ナンノニクサニ)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(《구간쇼》). 렌게오인, 니이히요시노야시로(新日吉社), 니이구마노야시로(新熊野社)에는 소엔(荘園, 장원)이 기진되었고, 이로 인해 고시라카와인의 재정 기반도 증대되었다. [[니죠 천황]]은 고시라카와인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품었지만, 이듬해 에이만(永万) 원년([[1165년]]) [[6월 25일]]에 병환이 악화되어 [[로쿠조 덴노|노부히토 친왕]](順仁親王)에게 양위하고 [[7월 28일]]에 붕어했다. [[로쿠조 덴노]]는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기에 중궁 무네코가 양모(養母)로서 셋쇼(섭정) 고노에 모토자네(近衛基実)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 유지를 꾀했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했고, 이 틈을 노려 고시라카와인을 지지하는 인세이파가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